양림역사문화마을 소개
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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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숙은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서 출생했다.
윤형숙은 ‘윤혈녀’라고도 불린다. 윤형숙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순천 매산학교 성경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광주 수피아여학교(광주 수피아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거행된 독립만세 운동의 선두에서 활약하였다. 독립운동 당시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실탄 사격을 감행하였으며, 선두에 섰던 윤형숙의 오른팔을 군도로 내리쳤다. 팔을 잃은 윤형숙 열사는 바로 정신을 잃었지만, 군중들의 만세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피 뭍은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더욱더 크게 외쳤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이 더욱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윤형숙 열사는 1919년 4월 30일 일본 보안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게다가 옥살이의 고난 끝에 결국 오른쪽 눈도 시력을 잃고 말았다.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불구의 몸이 되어버린 윤형숙은 평생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았지만, 민족과 이웃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외팔이 선생님, 외눈박이 선생님”이라 불리며 전도와 문명 퇴치 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윤형숙은 1950년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잡혀갔다가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 되던 날, 퇴각하는 인민군에게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리는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학살당한다. 2004년,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윤형숙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소심당(素心當) 조아라 선생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2년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서 조형률 장로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신학을 배우고 수피아여학교에 진학, 당시 담임이었던 김필례 선생을 만나면서 YWCA를 비롯한 사회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뒤 선교사 서서평 여사가 운영하던 이일학교 교사로 있던 중 광주학생 독립운동 때 참여했던 ‘백청단 은지환 사건’ 내막이 밝혀져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운동의 부당성을 주장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개월간 구금되며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었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광주부인회’를 출범시켜 여성들의 힘을 결집시키며 우리 민족의 정지와 자존심을 찾기 위해 앞장섰다. 한편 일제 탄압으로 문을 닫은 광주YWCA와 수피아여고 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뒤 광주YWCA에서 총무, 회장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셨으며, 광주어머니회, 걸스카우트, 광주여성단체협의회 등을 육성 발전시켜 여성들의 계몽과 권익을 위해 35년 동안 선도적 역할에 앞장섰다.
6.25 직후인 1952년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을 위해 ‘성빈여사’를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이들을 위해 3년제 야간중학교인 ‘호남여숙’을 세웠고 그리고 청소년 야학 ‘별빛학원’을 개설하였다. 소외당하는 여성을 위한 계명여사, 사회복지법인 소화자매원 이사장을 맡아 소외된 계층을 위한 복지운동을 이끌었다.
강운 최승효는 대구사범대학교를 졸업하고 1968~1982년에 광주문화방송주식회사에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전남도청 자문위원회 위원, 정수 장학회 감사, 강운 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81년에는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전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82년에 국민훈장 동백상을 수상했다. 최승효는 방송사 재직 시에 고서화를 모으는데 열성을 쏟았고, 지역인사들의 문화 교류에 앞장섰다.
최승효 사후, 그가 소장했던 고서화와 간찰 등 2,700여 점을 국립전남순천대학에 기증했다. 최상현의 가옥을 인수하여 현재 양림동에 최승효 가옥(시문화재 제2호)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아각은 버지니아 주의 스탠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캔터키 윈체스터에서 목회자의 아들로 1945년 켄터키 웨일리어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김아각은 1918년 26세에 선교사로 목포에 와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주로 영흥학교 교장으로서 목포 근대 교육을 이루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또한 유진벨 선교사가 설립한 이래 1940년부터 광주의 수피아, 숭일학교의 이사장을 맡았다. 1938년 평양신학교 교수 사역도 한 그는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으나 해방 이후에 다시 목포를 찾아와 광주와 목포고등성경학교 교장을 지냈다. 김아각은 1966년 74세에 은퇴하여 조지아 주에서 지내다 79세로 별세했다.
최원순은 광주 출신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다. 최원순이 동경 유학 시절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하고 유학생들을 결집하였다. 그리고 조선청년독립단 결성하여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독립선언 발표를 주도 하였다.
최원순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민족의 궐기를 호소하는 지하잡지인 『민족이여 일어나라』를 간해 국내외에 배포하는 등 언론인으로 해야 할 역할을 실행하며, 독립투쟁을 활발히 벌였다. 또한 최원순의 부인인 현덕신 여사는 동경 여자유학회를 꾸려 독립운동의 자금을 조달했다. 이후 최원순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예가 남용 김용구가 지은 춘설헌에서 은거하며 신병을 치료하였다.
최한영은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광주 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19년 김강, 최병준, 황상호 등과 함께 광주 3.1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동경 유학생인 정광호가 귀국하여 동경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 거사를 청년들에게 알려주니, 2·8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두었다. 그리고 3월 10일 독립만세 시위를 위해 모인 군중 1천여 명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다음,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 안을 행진하였다. 이날 저녁,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에 이르자 많은 경찰과 기마헌병이 김 철 등의 주동자를 체포하여 갔다. 이때 그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일제는 재향군인과 소방서원까지 투입하여 무력으로 시위군중을 탄압하였다. 결국, 시위대열은 무너지고, 그도 결국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을 받아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조국 독립을 향한 최한영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이후, ‘청년학원’에서 체육부장으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에는 광주의 원로로서 ‘광주시민 수습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문용동은 광주 장로회 호남신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전도사였다. 그는 교회를 다녀오던 길에 공수부대원에게 맞는 노인을 돕다가 함께 폭행당하면서 다음날부터 매일 시위에 참여했다. 문용동은 도청에서 결성된 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하고, 다이너마이트가 있는 지하실의 무기관리 임무를 맡았다. 이날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 엄청난 피의 대가는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서른두 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고 셀 수 없이 쏘아대는 총알을 피해 숨어있던 문용동은 다른 한 사람(김영복)은 헬기에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총소리도 멈추었고 헬기에서 하는 말을 믿고, 안심되어 문을 열고 나갔는데 나가는 순간 자동으로 쏘아대는 총을 맞았다. 앞에 가던 문용동은 가슴에 3발을 맞아 사망했다. 그는 ‘광주의 마지막 희생자’이자 ‘유일한 목회자 희생자’였다.
최상현은 광주 최고 부자였던 최부잣집 최명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상현은 일제강점기 중국과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으며, 계림동에 전남 양조장을 개설하는 등의 사업을 하였다. 최상현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무등산 절경과 마주한 양림산 경사지를 이용해서 1,000평의 대지에 매우 큰 규모의 전통 가옥을 지었다. 당시 그의 집은 압록강 근처에서 구해온 목재를 썩지 않도록 바닷물에 3년이나 담가두었다가 사용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최상현은 대청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소에 다락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로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최상현의 가옥은 구한말 전통 가옥의 연구와 이해 자료 및 건축사적 의의가 있어 ‘광주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