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역사문화마을 소개
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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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벨은 부인 로티 벨 선교사와 1895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목표선교부와 광주선교부를 창설하고 광주, 전남지역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척박한 양림동에 숭일 학교와 수피아여학교, 광주 최초의 종합병원인 광주 제중원(광주 기독병원)을 세우고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유진벨은 ‘광주·전남 기독교의 개척자’라 불린다. 그는 과로로 건강이 악화하여 57세에 별세하여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진벨의 둘째 딸 샬롯 벨이 윌리엄 린튼과 결혼하여 린튼가의 외증손자들이 유벨기념재단을 설립하고 현재 까지 한국관련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오방(五放) 최흥종은 광주광역시 불로동에서 태어나 양림동에서 자랐다.
최흥종은 윌슨과 포사이드 선교사를 도와 나환자 치료에 헌신하였으며, 3·1 운동 때 김철과 같이 전라남도 총책으로 민족운동에 헌신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최흥종은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1922년 광주 북문 밖 교회(현 광주중앙교회)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금정교회(제일교회) 담임목사를 겸임하며 광주 YMCA의 설립을 주도했다.
최흥종은 광복 이후에 결핵 환자, 나환자 등 사회의 냉대를 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한국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한다. 그는 '광주의 아버지'로 불리며, 평생 헐벗고 굶주리거나 버림받은 소외계층의 고난에 동참했다.
1966년 5월 14일, 그가 별세하자 광주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광주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됐다. 그리고 정부는 그에게 1962년 애국훈장,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오웬은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니언신학교 졸업하고, 버지니아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오웬은 1896년에 한국에 와서 여의사이자 선교사인 화이팅양과 결혼했다. 그리고 유진벨이 개설한 목포 선교부에 합류하여 한국어를 배우면서 의료 선교를 했다. 더불어 교회에서는 성경 공부를 가르쳤다.
1899년 오웬은 목포 진료소를 개설하여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하며, 호남지역 선교사업에 힘썼다. 그리고 10년 후인 1909년에는 191평 규모의 번듯한 석조양옥의 ‘부란취(富蘭翠)’ 병원을 개원했다. 오웬은 의료사업과 전도 사업을 병행하였으나,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자 의료 활동을 중단하고 전도 사업에 치중하였다.
오웬은 광주 나주, 남평, 영암, 장흥, 보성, 능주, 순천 등 14개 군을 순회하며 14개 교회를 담당했는데, 1907년에는 교회가 20개로 늘어났고 세례교인과 학습교인도 급격히 증가했다. 다른 선교사들보다 세 배나 넓은 사역지를 돌아보며 과로하던 오웬은 1909년 3월 장흥 지역을 순회하다가 병을 얻었고, 광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별세했다.
우일선은 미국 워싱턴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1908년 광주기독병원 2대 원장으로 의료사역을 시작하였다. 우일선은 솜씨 좋은 외과 의사로서 더 발전된 현대적 의술을 시행한 이 지역 서양의학의 선구자였다.
1911년에 우일선은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버림받고 무리 지어 거리를 배회하는 수많은 한센병 환우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광주시에 한센 환자 집단 거주지이자, 이 지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제중병원(Ellen Lavine Graham Hospital, 현재의 광주기독병원)을 건축하였다. 우일선은 한센병 환자 집단 거주지 내에 학교를 세워 환우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성경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완치된 환우들에게 노동력과 적성에 맞는 각종 직업교육을 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도록 자활의 길을 열어 주었다.
우일선은 1926년 정부의 한센환자 이주정책에 따라 여수시 율촌면(현재의 애양원)에 새로운 집단 거주할 곳을 조성하고 이주하여 한센병 환우들과 함께 생활하며 의료 선교에 성심을 다했다. 또한, 우일선은 어린아이들을 좋아하여 고아들을 돌보고 광주지역 주일학교 책임자를 맡아 크게 부흥시켰다.
서서평은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처녀 간호 선교사였다.
그녀는 최흥종 목사가 설립한 나병 환자 수용소를 틈나는 대로 찾아 나병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치료에 전념했다. 서서평은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했다. 조선인 목회자 등과 함께 50여 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했는데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고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 명에 달했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서서평은 간호사들을 길러내기 위해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조선 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다. 서서평은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을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었고 이와 아울러 인신매매 반대,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서서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하였다.
독신 여성의 몸으로 14명의 한국 고아를 양자로 키운 서 선교사. 그녀는 만성 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고생하다 향년 54세에 별세했다. 이후 서서평의 시신은 의학연구용을 기증됐으며, 그녀가 남긴 재산은 자신이 사용하던 담요 반조각과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많은 사람의 슬픔 속에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그녀의 시신은 광주 양림동 선교사묘역에 안장됐다.
서서평은 1930년대 미국 장로회가 전 세계에 파견된 선교사 중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되었다.
고든 어비슨은 1891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의 수탈로 피폐해진 한국의 농민과 농촌을 돕기 위해 미국 YMCA는 고든 어비슨 등 농업전문 간사 7명을 한국에 파견했는데, 그는 부인(프란세스)과 두 아이를 데리고 광주 YMCA 최영균과 함께 호남 지역을 맡았다.
그는 농업전문가로서 쌀농사 외에도 토양을 좋게 하는 법, 우량종자 보급, 종자 고르는 법, 온실농업, 목공 등을 가르쳤으며 또, 농촌지역 곳곳에 야학을 열어 문맹 퇴치에도 힘썼다. 그리고 동역자들과 함께 각처에 신용협동조합과 농우회를 결성, 생활개선과 문화보급에도 나섰다. YMCA가 열었던 대규모 야간학교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일제강점기 한국 청소년들의 체력과 호연지기 함양을 위해 다양한 사회체육 활동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당시 광주지역 사회체육의 터전을 놓는 데 힘을 보탰다. 고든 어비슨은 광주 YMCA의 최흥종·최영균 등과 협력하여 광주YMCA농업실습학교(어비슨농업학교)를 세워, 인재들을 선발해 농사와 성경 교육을 함으로써 농촌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자녀들의 저금통과 사재까지 털어 호남지역 농촌운동과 광주 YMCA를 뒷받침하던 고든 어비슨은 1939년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출국당해, 부인과 자녀(1남 2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는 1967년 숨질 때까지 한국과 YMCA 운동을 그리워하며 바깥 현관문에 커다란 태극 문양과 YMCA 휘장 모형을 두고 살았다.
고든 어비슨의 부친 올리버 어비슨은 고종황제의 어의(御醫)를 지냈고, 광혜원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편했으며 한국 근대 의료와 의학교육의 기틀을 놓았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전쟁 중 초창기 한국군 간호부대 고문으로서 간호인력을 양성했고, 또 그의 외아들은 보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해 3대에 걸쳐 한국에 헌신했다.
배태선은 1974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1974년부터 2년간 한국어를 공부한 후 1975년부터 1981년까지 광주광역시에서 가족과 함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배태선은 1980년,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사태 소식을 외부에 알리는 일에 애썼다. 나중에 한국 정부와 국회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였고 광주 사태상황을 기록한 책을 쓰기도 했다.
1981년 침례신학대학교에 취임하여 10년 동안 교회사 교수로 강의 하고 학장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아시아침례신학대학원(ABGTS)의 한국 분원장을 역임했다. 1991년 미국으로 귀국 후 일리노이주에서 목회 사역을 감당하고 2010년 공식 은퇴를 했으며, 2015년 생을 마감하며 자신의 시신은 텍사스 주립대학 알링턴 캠퍼스 병원에 알츠하이머 연구를 위해 기증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프레스톤 2세는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광주ㆍ전남지역에서 남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변요한 목사(Rev. J. F. Preston)의 아들로 미국 데이비슨 대학과 듀크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로서 고향인 광주로 돌아왔다.
프레스톤 2세는 선교지에서 왕성한 사역을 하던 선교사의 자녀로 한국에 대한 지식과 문화, 언어, 당시 상황에 능통했다. 그는 광주 제중병원의 3대 원장인 부란도 사후, 의료선교사가 부재중이었던 파견 진료를 다니다가 1940년부터 광주 제중병원의 4대 원장이 되었다.
프레스톤 2세는 유능한 외과 의사이자 병원 원장으로서 의료사역을 하였고 1940년 10월 일제에 의해 병원이 강제 폐쇄되면서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서로득은 1911년에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장로이다.
미국에서 철도국장과 사범학교, 교장 등 화려한 공직 경력을 가지고 있던 서로득은 광주에서 많은 사립학교 운영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1913년, 전국 주일학교 연합회 실행위원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주일학교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아교육 사업에 헌신했다. 그리고 확장주일학교를 중심으로 중흥학교(현 중흥교회 자리), 서흥학교(현 상무동 내방교회 자리), 숭명학교(구 역전), 배영학교(현 서현교회 자리)라는 4년제 간이학교를 세웠다. 서로득은 윌슨과 함께 광주의 주일학교운동을 이끈 장본인이다.
또한 서로득은 건축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로서 1927년에 수피아 여학교의 윈스보로 홀(현 수피아여중 본관). 전주 신흥학교의 리차드슨 홀을 지었다. 1937년, 서로득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김윤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장로교 선교부가 거점을 목포에서 광주로 옮기기로 할 때, 첨병의 역할을 했다.김윤수는 양림동 일대에 부지를 매입하고, 오웬과 유진벨 선교사 등이 거처할 두 채의 사택을 건축하는 등 사전 준비를 다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광주로 이사해, 1904년 12월 25일 유진벨 사택에서 예배를 드리니 광주 교회의 첫 시작이었다.
김윤수는 선교사들이 자리를 비웠을 경우 대신 자리를 지켰으며, 주일학교 교장으로, 또 지역민에게 전적으로 맡겨진 수요 기도회에서는 자신의 순서가 왔을 때 기도회를 인도했다. 이후, 그는 광주 북문안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이기풍은 평양에서 출생했다.
그는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신자들을 박해하던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청일전쟁 당시 원산으로 피난을 떠나면서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1894년 기독교에 입교하며, 최연소 신학생이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1918년 그는 전라노회의 부름에 따라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초창기 교회발전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한편 이기풍은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총회장에 1921년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기풍은 일제의 치하에서 민족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 과감히 일제에 대항하여 교회를 굳건히 지켰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정면으로 맞서 반대여 미국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모진 고초를 치르고 출소하였으나, 이미 건강히 심히 악화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풍은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도서지방 돌산 완도, 여수군 남면 우학리, 등을 순회 전도하면서 교회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기풍은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여수 우학리 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별세했다. 그리고 11년 후인 1953년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묘지에 이장되었다.
남궁혁은 애국지사 가문에서 태어나 평양 감사 외조부를 따라 일곱 살까지 평양 감영에서 성장했다.
그는 배재학당을 수석 졸업 후, 세관의 관리가 된다. 그러나 신학에 뜻을 두어 1917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최흥종은 광주 양림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큰언니 김함라와 결혼한다.
남궁혁은 1922년 선교사들의 거듭된 유학 권면에 따라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1925년,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금의환향한다. 그는 2년 뒤,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오르며, 유니언신학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신약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남궁혁은 1938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거부를 결의하면서 평양신학교도 폐교되자 다음 해에 중국 상해로 망명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학사전’ 편집과 ‘신학지남’ 교열에 주야 없이 심혈을 기울인다.
광복을 맞으며 남궁혁은 한국 과도 정부의 재무부 세관 국장에 임명되어 세무행정의 체계를 세운다. 그리고 1948년 교회 본연의 업무에 돌아가기 세관 국장의 자리를 사임한다. 이후, 6·25전쟁이 일어나고 남궁혁은 북한에 납치당한 후, 소식이 끊긴다. 그때 그의 나이가 이미 69세였다.
김창국은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모와 모친은 전주 최초의 신자이었기에 그도 일찍부터 기독교 교인이 되었다. 김창국은 전주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5명의 신자 중 한 사람이자, 근대식 교육은 최초의 신흥인이다. 김창국은 숭실중학교를 졸업하며,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함으로써 호남 지방 최초의 신학교 졸업생이 된다. 1917년 전라노회는 그를 제주도 전도목사로 임명하였다.
김창국은 제주 내도리 교회, 삼양리 교회 등을 설립하며, 6년 동안 전도에 심혈을 기울여 제주도를 복음화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김창국은 1922년 광주 남문외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하였고, 광주 양림교회에서 25년간 봉직하였다.
타마자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존 산드라 탈미지와 메라일라 크레인의 아들로 전기기계 공학을 전공하였지만, 곧 사우스웨스턴 장로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910년 타마자는 선교사로서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유진벨 선교사와 함께 광주 선교부를 개설한다. 그리고 타마자는 담양, 화순, 순창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많은 교회를 설립했고, 교인들은 절제와 내핍 생활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별명을 ‘탈깍쟁이’라고 불렀다.
타마자는 1923년 광주 숭일학교 5대 교장을 맡았는데, 당시 야구부를 신설하여 호남지역 야구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광주야구 명문학교인 광주일고 야구의 시작인 것이다.
일제강점기 타마자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듯이 한국도 해방시키실 것이라며 아이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일본의 억압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일제 말, 선교사들이 출국할 때 타마자가 나가지 않자 일본 경찰은 미국 첩자라는 죄목으로 그를 7개월 동안 옥에 가두고 강제 추방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인 1948년 다시 광주로 돌아와 선교 사역을 계속하였다.
타마자는 6·25전쟁 때 잠시 일본에 머물렀으며 광복 이후, 1955년 65세로 은퇴 전까지 광주에서 계속 선교와 교육활동을 계속하였다.
포사이드는 켄터키주 머서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켄터키주 루이빌에 있는 의과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집 없는 사람들을 돕는 선교회에서 봉사했고, 해외 선교에 더 깊은 관심이 있던 차에 1904년 전주로 파송되었다. 한국에 도착한 포사이드는 전주에서 순회 진료를 하며 보육원을 운영했다.
특히, 한센병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나환자의 아버지’라 불렸는데, 이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포사이드 선교사 1909년 4월, 광주 오웬 선교사가 지방 전도를 나갔다가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말을 달려 광주로 들어오던 나주지역 길가에 가마니를 뒤집어쓴 채 신음하고 있는 한센병 여인을 발견했다. 그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입히고 자신의 말에 태워 광주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벽돌 굽던 가마굴에 임시로 나환자를 수용하고 격한 냄새와 피고름이 터져 흐르는 손과 발을 만져가며 그 여인을 정성으로 치료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오웬 선교사는 이미 장례를 치렀고, 포사이드 선교사가 문둥병 환자를 치료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광주 인근의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급한 대로 양림동에 세 칸짜리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환자 7명을 수용하고 1911년 무등산 자락에 정식으로 요양원 건물을 마련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의 출발이다. 이후, 포사이드는 풍토병에 걸려 귀국한 뒤 45세의 나이에 별세하였다.
존 바실 심슨은 영국성공회 선교사다.
그는 1902년 웰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존 바실 심슨은 1910년 영국복음전도협회(SPG)의 파송을 받아 일본에 부임하여 성앤드류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리고 이후, 1915년 한국으로 건너와 군종사제로 2년간 복무했다.
존 바실 심슨은 1925년 다시 일본 코오베주교에 임명되어 일본성공회 선교에 종사하였고, 1941년 귀국하여 이듬해 별세했다.
놀란은 미국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미국남장로교 한국 의료선교사로 1904년 8월 15일 한국에 도착해 목포 선교부에서 의료사역을 시작하였다. 1905년 11월 8일 광주에 도착한 놀란은 유진벨의 임시 사택(후에 제중원의 전신)에서 진료소장을 맡는다. 그리고 11월 20일 진료소 문을 열어 9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의 초대 원장을 지낸 놀란은 광주지역에서 최초로 현대 의료를 시작하여 미신적 질병 치료와 비과학적인 민간요법에 의존했던 사람들에게 과학적인 질병 치료의 기회를 제공하고 미신에 의존했던 사고방식을 전환 시켜 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부란도는 미국의 브랜즈 스테이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7년 데이빗슨대학에 입학했으며, 1919년 선교에 뜻을 두고 버지니아 대학 의학부로 옮겼다. 그리고 미국남장로교 한국 의료선교사로 1924년 11월 군산에 도착하여 구암리 병원에서 의료사역을 시작하였다.
1930년부터 광주기독병원 3대 원장으로 부임한 부란도는 한센병에 이은 결핵 퇴치라는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러던 중 1933년 제중원에 화재가 발생했다. 열악한 의료환경에도 대민 치료에 쓰이던 대부분 약품과 의료기구가 병원 건물과 함께 전소했다. 병원 복구를 위해 호남선교부와 병원 직원들과 광주에 살고 있는 시민들까지 힘을 모았다. 결국 1934년 한국인 환자들을 위한 중앙난방시설을 갖춘 새로운 병원이 지어졌다. 그 중심에 ‘부란도’가 있었다.
1936년 ‘탈마지 기념 결핵병동’으로 한반도 남단에서는 최초의 결핵 병동으로 인정되었으며, 환자들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얻었다. 결국, 밀려드는 환자를 수용하기 위하여 결핵 환자 수용시설은 확장되었고, 결핵병동 증축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부란도는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938년 44세의 젊은 나이로 선교지인 광주 제중병원에서 별세하였다. 그리고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묻혔다.
고호번은 미국 코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49년 한국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는 1951년 일제강점기에 폐쇄되었던 광주 제중병원을 재개원하고, 제5대 원장으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웃에게 치료 약과 먹을 것을 주고 각종 구호물자로 빈민 구제에 나섰다. 이후, ‘광주의 성자’로 불리며 그 당시 우리 사회에서 보살피지 못하던 불구폐질자, 퇴원 이후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한 결핵 환자, 윤락여성 등을 위해 자립원, 요양소 등을 건립하여 전도하고 그들의 재활을 돌보았다.
고호번은 특히, 각혈 도중 기도가 막힌 환자를 살리고자 피로 범벅진 분비물을 입으로 빨아들이는 일도 마다치 않을 정도로 결핵 환자를 치료하는데 헌신하였다. 고호번은 1967년 막내아들(Philip T Codington, 1960-1967) 이 수영 중 익사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고호번은 1974년부터 방글라데시 다카시의 통기진료소(Tongki Clinic), 텔레구진료소(Telegu Clinic) 등지에서 1999년까지 의료선교사로 헌신의 삶을 살았으며, 방글라데시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의 선교병원들이 1983년 KOMMS(한국기독교해외의료선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93년 꼬람똘라기독병원을 설립하여 선교비 지원과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으며 광주기독병원에서는 꼬람똘라 기독병원에 더욱 효과적인 복음 사역을 위해 ‘100주년 기념 선교센터’를 건축하였다.
심부선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생으로 1954년 멜버른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일반외과와 흉부외과 수련을 받았으며 부인 마가렛과 함께 한국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심부선은 1964년부터 광주기독병원에서 흉부외과 과장으로서 폐절제술 등 결핵 환자 진료와 수술에 헌신하였다. 이전에는 광주기독병원에서 폐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을 전주예수병원으로 후송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심부선 선교사의 부임으로 인해 광주의 결핵 환자들에게 더욱 빠르고 효과인 진료가 이루어졌다. 이후 그는 1966년부터 1967년 1월까지 광주기독병원 6대 원장으로 사역하였다.
이철원은 미국 데이비슨 대학을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1958년 부인과 2명의 자녀와 함께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이철원은 1961년 9월 광주기독병원 외과 과장을 지내다 1967년 제7대 원장이 되었다. 그는 광주기독병원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재단에서 분리하여 독자적인 경영이 가능하도록 경영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며 대한민국의 발전과 사회적 변화에 따라 다양한 진료과를 갖춘 종합병원으로 발전시켰다. 더불어 의사교육기관(수련병원)으로 발전하여 체계적인 기독 의료인을 양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이철원은 기독교인 간호사 양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수피아간호학교’(현, 기독간호대학)를 설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방사선사, 임상병리사, 치과 기공사 수련 제도를 도입하여 지역의 보건의료인 양성에도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미국, 독일, 호주 등에 의사, 간호사, 행정직 등의 직원들을 보내 연수를 받게 함으로써 선진 지식을 빨리 접목하여 능률적으로 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지역사회의 보건사업에도 관심을 가진 이철원은 광주.전남지역의 무의촌 지역에서 꾸준한 순회진료, 모자보건교육, 전염병 예방교육 등을 실시하였다. 특히 소아마비로 인해 심각한 후유장애를 겪는 어린이들을 위해 소아마비 백신을 들여와 광주지역 어린이들에게 주사하여 소아마비를 퇴치하기도 하였다.
그는 1986년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미국으로 귀국한 후에 ‘현대의학과 선교명령’ 등 저술을 통해서 선교사 지망생에게 소명의식을 갖도록 하였으며 2005년에 ‘광주기독병원 100년사: 선교사시대’를 출판하였다.
유수만은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시간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한 후 주일미군으로 복무하면서 선교사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콜롬비아신학교에서 선교사 훈련 과정을 마친 후 1961년 9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2년간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다.
유수만은 1963년 광주기독병원에 부임하여 그 후 1986년까지 23년 동안 치과 전공의 수련과정을 개설하고, 정기적으로 무의촌 진료 봉사 활동을 하는 한편 암환자들을 위한 특수 보철 치료를 시행하는 등 치과의료선교에 매진하였다. 더불어 호남 최초의 조선대학교 치과대학과 광주보건전문대학 치위생과 개설에도 앞장섰다.
20여 년간 한국에서 치과의료 선교사역을 해온 유수만은 1982년에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의 제자들과 서울대생들이 주축이 되어 유수만 선교사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아 그해 3월에 지금의 치과의료선교회를 설립했다.
유수만은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네브래스카 치과대학 교수 등으로 봉직했고, 은퇴 후에는 이동식 치과 차량을 개발해 북한에 보급하는 등 의료봉사활동을 계속했다.
도마리아는 1912년 미국 남장로회의 선교사로 조선 땅, 광주에 왔다.
그녀는 1922년 오늘날 여전도회의 근간이 된 부인조력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한국간호협회를 창설한 간호선교사 서서평이 세운 여성신학교인 광주이일성경학교와 수피아여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도마리아는 조랑말을 타고 지리산 준령을 넘나들며 고창과 장성, 나주와 화순지역에서 선교활동 하며, 수피아여학교에서 30년간 여성들을 깨우치며 그들을 여성 지도자들로 길러냈다.
도마리아는 1940년 일제가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미션스쿨을 자진 폐교하며 저항했으며,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든 외국인에 대한 강제 출국령이 떨어졌지만 이를 거부하고 6개월간 연금 상태로 조선에 머물렀다.
그녀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7월 22일 한국을 떠나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할 때까지, 37년 9개월간 이 땅에서 독신으로 지내며 기독교를 전파했다.
유화례는 뉴욕 주 쿠퍼스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당시 미국 남장로교가 이미 120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한국을 접하게 된다. 유화례는 1926년, 여름에 미국 남장로회에서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에 왔다. 그리고 1927년 서른넷의 겨울, 수피아 여학교의 음악 교사가 된 이후 오랫동안 수피아 여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다.
그녀는 6·25전쟁 때에도 피난 가지 않고 화순에 숨어 지냈으며, 미일 전쟁 때와 신사 참배 거부로 일본에 의해 강제 출국당한 일 외에는 1978년까지 한국에 머물며 선교활동을 했다. 그리고 일제가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려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 대다수 떠났을 때도 광주의 타마자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타마자 목사가 광주경찰서 유치장에 100일 동안 있다가 1942년 6월에 한국을 떠나기까지 유화례는 나병 환자들이 사는 여수 애양원에서 원목 생활을 하였다. 그때, 그녀는 음성 나환자의 두 달 된 딸 진주를 양녀로 입양해서 보살피기도 하였다.
그녀는 51년간의 헌신적인 사역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며, 1978년 한국을 떠나 버지니아의 선교사 은퇴관에 머물렀다. 유화례가 103세의 나이로 별세하던 그 순간까지 그녀의 기도 제목은 언제나 ‘한국과 이 땅의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최병채(崔炳釵)의 호는 춘담(春潭)이며 본관은 초계(草溪)로, 조선 중종 대에 의정부 사인(舍人)을 지낸 신재 최산두(崔山斗)의 16대손이다. 1907년 5월 9일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운룡리에서 최경환의 장자로 출생하여, 1987년 6월 12일 8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1928년 약관인 22세의 나이에 한약업사 면허를 취득하신 후, 일본 오사카 하마대라 침구학교에 연수 후 귀국, 43세 되던 1949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인과원(因果院)이라는 한의원을 연다. 그는 침구술(鍼灸術)의 대가로 이름을 날린 명의였지만 가난한 환자에게는 치료비도 받지 않은 참 의술을 실천하였고, 전 재산을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쾌척하였다.
그는 고향에 운룡초등학교(1947)를 시작으로 춘태여자고등공민학교(1960), 신농농업기술학교(1965), 춘태여자중학교(1966), 신농중학교(1967),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1967), 국제고등학교(1986) 등을 설립하였고, 1989년 국제고등학교가 캐나다의 라살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13명의 유학생을 보내는 등 육영사업에 평생을 바친다.
그의 육영사업은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환이나 여직공,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육영사업과는 차별된다.
특히 그는 1957년, 학동에 충무공 이순신을 주벽(主璧)으로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횃불을 높이 드신 문열공 김천일, 충장공 김덕령, 충장공 정운, 금계 노인,수은 강항, 수사 송희립을 모시는 무광사(武光祀)라는 사당을 세웠다.
무광사는 1966년에 치러진 전국체전의 점화처가 되는 등 시민들의 민족정신을 계승 선양하는 중심지였다.
명의, 사회사업가, 참교육자로서의 삶을 산 그는 1982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한다.
부명광은 중국 지림(길림)에서 미국 남장로교 중국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국의 리치먼드 유니언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중국과 평양, 미국에서 공부했다. 부명광은 1952년,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특히. 호남신학교 설립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1956년 호남신학교의 전신인 ‘중앙성경학교’를 ‘호남성경학원’으로 변경하고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주체로 운영되던 학교가 한국인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1961년 호남성경학원과 광주 야간 신학교, 순천 매산 신학교 등 3개교가 ‘호남신학원’으로 통합되면서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부명광은 호남성경학교와 호남신학원의 개교를 통해 호남 지방의 목회자 양성과 배출을 실질적으로 이룩하는 데 힘썼다. 그 뿐만 아니라 퇴임 후에도 미국 남장로교회 극동선교 담당 총무로 재직하면서 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원요한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인 원한경(H. H. Underwood)의 차남으로 1941년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1946년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광주호남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영국으로 귀국하였으며, 그의 유언대로 1994년 그의 할아버지가 있는 양화진에 안장함으로 양화진에서 언더우드 가(家6)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양화진 선교원에는 언더우드 가족과 원요한 선교사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원요한은 그의 부인이자 교수였던 원진희 목사와 함께 1993년 25번째와 26번째로 광주 명예 시민증을 받았다. 원요한이 호남신학대학교 재직 당시 살던 집은 현재 ‘호랑가시나무 창작소’로 개조하여 문화적 공간으로 재탄생 되었다.
인도아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린튼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되어 한국에 들어와 군산과 전주를 중심으로 선교 사역을 펼친 선교사였다. 윌리엄 린튼은 한국에서 4대에 걸쳐 선교사역에 봉사하며 한남대학의 설립 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구한 말 근대교육과 의료사역을 펼쳤던 유진벨의 외손자이다.
인도아는 윌리엄 린튼의 넷째 아들로 미국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다. 인도아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것은 1953년이었다. 이후, 인도아는 그의 부인과 함께 광주에서 교육자 및 순회복음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인도아는 호남신학대 학장(1973~1978)으로 25년간의 헌신적인 선교사역 이후 은퇴했다. 그리고 은퇴 이후에도 왕성한 사역을 이어가다 2010년 1월 11일 안타깝게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허철선은 유니언신학대학 졸업했다.
그는 아내(마르다 헌트리Martha Huntley) 와 함께 미국 남장로교회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1965년 9월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광주선교부에서 아내와 함께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1984년 귀국할 때까지 다양한 사역에 전념하였다.
김마리아는 황해도 송화(松禾) 출생으로 그녀의 고모는 김필례다.
김마리아는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여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했다. 김마리아는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여자학원에서 유학을 하며, 재일 동경 유학생들과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그리고 1919년에 귀국한 김마리아는 황에스터와 함께 각지를 돌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김마리아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이 되었으나, 비밀조직의 탄로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출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사와 상하이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맡았다.
김마리아는 1923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뉴욕 비브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황에스터 등 8명의 옛 동지들과 함께 미국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槿花會: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935년 귀국하여 마르타윌슨 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여생을 그리스도교 전도사업과 신학발전에 힘썼으나 오래전 고문으로 얻은 병이 재발하여 사망했다.
김마리아는 여성교육이 전혀 없었던 시절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한 선구자로 일생을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그 공을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고광표의 호는 우봉(又峰),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그는 창평 출신이나 광주 양림동에 살았다.
1933년 광주 대인동 권소아과 옆에 창평상회를 개설하고 양림동 집에는 삼광농장 사무실을 개설하여 농토를 관리하며 무등 양말 공장을 경영했으며 현재는 기념관 형태로 보존하며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고광표는 해방되자 전남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재무부장에 선출되어 도의 행정권을 인계받고 중앙의 신임장을 받아 해방정국의 정상화에 노력하였다.
1946년, 과도 입법의원 창설 선거에서 최종섭, 홍성하와 함께 간접선거에 의해 선출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전남도당 총무를 맡아 반탁운동 집회를 주도하였다. 이후 독재정치의 압박과 행정당국의 비협조로 정치 일선에 손을 접고 사업경영에 들어선다.
1952년 대창석유(주), 1966년 대창운수(주), 1983년 광주화물자동차터미널(주)를 설립하여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하였고 1989년 재단법인 우봉장학회를 설립하여 지역인재 육성과 불우한 청소년을 도왔다.
1968년 광주은행 창립총회에 발기인 대표인 고광표가 의장직을 맡아 정관을 통과하고 임원을 결정했다. 주식회사 광주은행 설립 이후 10년간 감사직을 맡았다.
이후, 고광표는 1977년 새마을금고 전남지부 협의회 제2대 회장에 추대되어 5년 임기 동안 금고를 내실 있게 성장시켰다. 그리고 대한석유협회 이사장, 동아일보사 감사, 전남지역 개발협의회 회장, 전남도청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지역사회 개발과 발전에 힘썼다. 1984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