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역사문화마을 소개
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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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은 최흥종 목사 누이의 아들로 광주 숭일 소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전주 신흥중학교에 다니던 중 셋째 형 정의은(조선공산당 당원), 누나 정봉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로 졸업했다. 이후 그는 의열단에 남아 비밀 항일운동에 종사하면서 한국의 절대 독립과 민주일본요인 암살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상해에 체재하고 있던 소련의 유명한 음악교수 크리노와 만나게 되어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하였다.
정율성은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 직후 중국 총리의 요구로 그해, 10월 중국 국적에 가입하고 음악작곡에 몸 바쳐 왔다.
정율성은 ‘중국의 악성’이라 불리며 중국혁명가곡의 최고봉 '옌안송’과 중국 인민해방군가가 된 ‘팔로군 대합창’을 작곡했다. 그리고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중앙가무단, 중앙악단에 종사하면서 일생동안 모두 4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정율성은 베이징에서 62세로 타계하며, 중국의 국립묘지 격인 베이징 시내 빠바오산 혁명묘역에 안장됐다.
이강하는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대 미술교육과와 동대학원 순수미술학과를 졸업했다. 이강하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80년부터 1998년까지 ‘남도 구상 미술의 맥을 잇는다’는 그룹 남맥회를 창립해 이끌었다.
이강하는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무등산과 영산강 주변의 역사적 한과 통일을 향한 염원을 사실주의적인 방식으로 화폭에 담아온 그는 치열한 작가 정신과 꼼꼼한 제작기법, 엄청난 제작량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맥’시리즈로 프랑스 ‘르 살롱전’에 출품하여 2회 연속 은상을 받았다.
이강하는 생전 5권의 화집을 발간하고 개인전 8회, 100여 회의 그룹전 및 기획전에 초대된 이 선생은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일본과 중국, 중남미, 러시아, 지중해 등을 돌며 기록한 기행문과 풍물화를 지역 일간지에 연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화가 한희원은 광주광역시 출생이다. 작가는 유년시절 양림동에 정착한 이후부터 양림동에 있었던 학강초, 숭일중, 숭일고에서 재학하며 양림동의 숲과 길에서 예술가로 가는 정신의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2003년 남구종합문화예술회관 개관 기념 전시회에 시인 김현승, 이수복, 곽재구 소설가 문순태, TV드라마 작가 조소혜의 작품을 회화로 표현하여 양림동의 문인들을 최초로 알렸고 양림동을 주제로 다수의 전시회를 개최하여 양림의 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품을 하였다. 양림동의 대표적인 축제인 굿모닝 양림의 추진위원장을 맡아 양림동을 알리는 일에 주력하였다.
2015년에는 사비를 털어 한옥을 개조하여 한희원 미술관을 양림동에 개관하였다.
화가 한희원의 작품은 시적인 문학성과 현대적인 회화성을 넘나들며 서정적 회화성의 대표 주자로 알려져 있다.
“양림동은 저에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준 곳이에요.
이 미술관은 제가 양림동에 드리는 일종의 헌사입니다.”
광주 양림동 137번지에서 태어난 정추는 외숙인 정석호의 영향으로 음악에 눈뜬다. 정석호는 1920년대 독일 베를린 음대에 유학한 성악가였다. 사랑방에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놓고 이탈리아의 저명한 테너가수 카르소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던 외숙의 모습을 지켜보던 정추는 그 피아노로 연주연습을 시작한다.
광주서중 재학 당시, 일본인 교관에 대한 비하발언과 조선어 사용문제로 저항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그는 서울 양정고보로 전학해 음악교사인 작곡가 안기영에게 사사한 후 1941년 일본대학 작곡과에 진학한다. 정추는 동경에서 작곡가 나운영과 전봉초와 교류하는 한편 윤이상의 스승인 야마다 가쓰오를 지도교수로 수학하던 1944년 학도병 징집을 피해 귀국한다. 마침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 서기장으로 선출된 형 준채가 서울 원남동에 ‘서울키노’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한 그는 ‘서울키노’에서 영화음악을 담당하다가 월북, 평양 국립영화촬영소 음악과장과 평양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 한국전쟁에 휩쓸린다.
전쟁의 와중인 1952년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음악원으로 유학을 간 그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적 계보를 잇는 저명한 작곡가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에게 사사함으로서 차이코프스키의 3대(代) 제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졸업 작품인 오케스트라 ‘조국’으로 최초의 만점 졸업생이 되었다. 정추는 1957년 모스크바 북한유학생들의 김일성격하운동을 주도한 이래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망명, 카자흐스탄 국립여성사범대 작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려인 집단농장인 꼴호즈를 찾아가 한민족의 음악적 문화유산이라 할 민요 1000여 곡을 채보함으로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고려인 가요를 보존 계승하는 음악인류학의 길을 개척했다. 1961년 구 소련 정부가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 성공을 축하하는 음악회에서 자작곡 ‘뗏목의 노래’를 직접 연주한 것을 비롯, 그의 작품 60여 곡은 카자흐스탄 음악 교과서에 실렸다.
그는 교향곡 ‘한국적 주제에 의한 교향모음곡’, 교향시 ‘조국’, ‘극적 교향모음곡’, ‘내 조국’ 등과 합창곡 ‘뗏목의 노래’, ‘도라지’ ‘아리랑’ 등을 남겼다. 성악곡으로 ‘진달래꽃’ ‘고향산천’ ‘두다라이’ ‘흘러가라 노래여’ ‘여기가 살기 좋은 고향이라네’ 등이 있다. 정추는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근로훈장(대통령상), 창작훈장, 공훈예술훈장 등을 수상했으며 200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2004년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아버지는 시인이셨고 피리와 퉁소를 잘 불으셨다. 나는 양림동 양파정에서 아버지가 불던 피리 소리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 아버지의 피리소리를 나는 교향시 ‘조국’에 그대로 인용했다. 이것이 나의 고향과 민족성 표현의 원자재가 된 것이다.”
김현승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선교활동으로 제주도와 광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평소 커피 애호가인 김현승은 호마저 ‘다형(茶兄)’이라 했다. 김현승은 1913년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고, 교지에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시가 문학박사 양주동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동아일보>에 발표되어 등단하게 된다. 그는 등단 이후 위장병의 재발과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폐쇄되자 광주로 돌아와 모교인 숭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일제로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아버지와 누이동생과 함께 투옥돼 고문을 당했고, 누이동생은 그 일로 사망했다.
김현승은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1945년 광복까지 시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과 더불어 모교인 숭일학교 교감으로 취임한 김현승은 교육자로서의 직책에도 충실하지만, 시작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무렵 여러 신문과 잡지에 많은 시편을 발표하며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과 교류하며 문단 활동의 폭을 넓힌다.
그의 많은 업적 중에 특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신문학>을 발간한 것이다. 이 잡지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간행되면서 범문단적으로 발표 지면을 제공했다. 김현승은 광주가 배출한 대표적 시인이면서 한국의 시문학사에서 한국 현대시의 지성적 감성 세계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종교시를 많이 썼지만, 획일성에 떨어지지 않고 품격과 다양성을 갖추어 현대 시를 빛내는 데 이바지했다. 그리고 전근대적 영탄과 감각적 이미지즘, 모더니즘 등 설익은 실험의 미몽으로부터, 숨 막히는 혼란으로부터 시를 시답게 함축적으로 발전시켰다.
이수복은 전남 함평 출신이다.
그는 경성대 예과를, 조선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후, 수피아여고, 숭일고, 광주일고, 순천고 교사를 역임했다. 이수복은 1954년 ‘문예’지에 ‘동백꽃‘이 서정주에 의해 추천되고, 1955년 ‘현대문학’에 ‘실솔’, ’봄비’가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어 ‘무등부’, ‘무덤과 나비’, ‘꽃상여 엮는 밤’, ‘외로운 시간’, ‘모란송’ 등의 작품을 현대문학에 잇따라 발표함으로써 1950년대 문단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수복의 시는 민요적 정서를 바탕으로 섬세한 한국적 서정의 세계를 한의 미학으로 승화시켜 박재삼, 이동주와 함께 1950년대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이수복은 198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권의 시집 <봄비>를 남겼는데 대표작 ‘봄비’를 비롯해 3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대표작 ‘봄비’는 겨울잠에서 막 깨어나려는 봄을 전통적 율조에 맞추어 예찬하고 있다. 특히 토속적인 시어와 부드러운 운율로 봄의 애상을 노래한 대표적 서정시로 1970년대 이후 고등학교 국어와 문학 교과서 등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수복은 처음부터 모국어의 체질과 그 전통에서 출발한 시인이다. 그는 전반적으로 동양적 정서를 부드러운 운율로 담아내는 전통적 서정시의 시풍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시인들은 시의 가치를 현대시학의 존재론적 고민보다는 언어적, 시적 완성도에 둔다. 그리고 담백하고 소탈한 자신의 인생과 시를 통해 겸손하고 고결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해 보여주었다.
문순태는 전남 담양 출생하였다.
그는 광주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이성부와 함께 김현승에게 시작법을 배웠다. 그리고 조선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숭실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순태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전남매일>의 전신인 <농촌중보>에 단편소설 <소나기>가 당선되었다. 그리고 1965년 『현대문학』에 「천재들」로 추천 받아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한 후, 1974년 『한국문학』에 백제 유민의 한을 그린 단편 「백제의 미소」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그는 1982년 제1회 문학세계 작가상을 받았다.
문순태는 순천대학교와 광주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광주전남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한(恨)풀이 과정과 고향 찾기’로 특징지어진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한의 뿌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과 분단 이후 가속화되었던 고향 상실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세계이다.
문순태는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는데, 분단 이후 한국사회에 계속되었던 대립과 갈등을 다루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민족적 동질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감으로써 전후소설의 새로운 장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황석영은 만주 신경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에 <입석부근(立石附近)>으로 <사상계>의 신인문학상에 입선하였으나 문단에 복귀하기는 1970년에 <탑(塔)>이 조선일보에 당선되면서였다. 초기의 작품에서는 탐미주의적 경향을 보였는데, 이런 면에서 그는 문장이 유려하고 기술적으로 우수하다는 것 외에 같은 세대의 다른 작가와 구별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오래된 정원」,「손님」 등을 발표하며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가 광주 양림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8년이었다. 광주에 온 황석영은 그때부터 광주의 민주화 운동권, 그중에서도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기획하고 참여하였다. 문화운동권을 창립하기 위해 진행했던 청년 학생들을 위한 ‘탈춤학습’으로 서울과 다른 지방 연희 패와의 연결을 해냈으며, 1979년 진보적 연희운동을 표방한 마당극단 ‘광대’의 창립과 1979년 돼지 파동을 극화한 마당극 ‘돼지풀이’ 공연에 그는 후원자이자 고문 역할을 맡으면서 깊숙이 참여했다.
황석영은 대하소설 「장길산」을 광주에서 집필하였는데, 1974년부터 착수하여 10년 만에 완간함으로써 민중작가의 면모를 확고히 했다. 황석영의 작품들은 인간성 상실 및 삶의 황폐화를 다룬 작품과 인간미를 상실케 하는 조건에서도 훼손된 가치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상이 담겨 있다.
이장순은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1964년 당시 태평극장에서 기타의 신 신중현의 공연 보고 반해 2년 뒤, 서울에서 4인조 그룹사운드를 만들어 활동했다. 보컬과 기타를 맡은 이장순은 잠도 안 자고 끊임없이 연습을 이어갔고, 문 닫은 공장을 빌려 연습실을 만들어 활동했다. 시간이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된 이장순의 밴드는 군 캠프에서 공연하는 등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이장순은 1972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12줄 기타와 함께 광주에 내려왔다. 그리고 충장로에서 통기타 가수와 DJ로 활동했다. 하지만 이장순은 80년대 후반 홀연히 광주에서 사라졌다. 그는 라디오 연예 다큐멘터리 ‘대중예술사’의 대본을 썼고, ‘가요무대’와 ‘열린 음악회’를 기획했다. 한국 대중음악사를 호령했던 이들이 가난에 신음한다는 안타까운 사실, 그들을 다시 조명함과 동시에 생계에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기획했다.
이장순이 다시 고향 광주로 돌아온 것은 2002년이다. 그는 양림동 사직공원의 통기타 촌을 이끌며, 오랜 과제로 남아있던 ‘한국 가요사’ 정리를 시작했다. 20년 넘게 모아놓은 방대한 자료를 엮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전라도닷컴’에 ‘이장순의 이야기로 쓰는 한국가요사’라는 연재를 했다.
곽재구는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하여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후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토착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의 초기 시 세계는 현실의 거대한 폭력에 대한 분노와 그 아래서 고통받는 민중들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들은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그는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는 비루한 그들의 삶에 피어 있는 조그만 들꽃을 발견해내는 섬세한 눈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곽재구는 1992년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으로 1995년 시집 <참 맑은 물살>을 펴냈으며, 동서문학상을 받았다. 곽재구의 시는 화려한 문구로 꾸미거나 치장하기보다는 삶 속에서 드러나는 진지한 생의 풍경을 시 속에 생생하게 작동시킨다는 평을 받는다. 현재 그는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배동신은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 때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해 카와바타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1943년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입상하며, 같은 해 일본 자유미술가협회 정회원이 됐다. 그는 ‘조선의 젊은 천채 우에노에서 꽃피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되었고, 이중섭은 아리랑을 불러 그를 축하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배동신은 광주서중학교, 전남여자고등학교, 순천사범학교, 진도중학교, 영암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47년 광주도서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에는 박철교, 강연균, 우제길과 함께 ‘수채화 창작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72년에는 ‘구상전’에 초대 회원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한국수채화협회’ 초대회장이 되었다.
배동신은 누드, 과일바구니, 항구, 산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광주에 있는 무등산 즐겨 그렸다. 대부분 수채화로 제작하였고 큰 붓을 이용한 빠른 필치를 보여주며, 과감한 생략과 확대를 통해 대상을 변화시켰다. 그의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특징을 지닌 것으로 분석된다. 하나는 그림의 대상을 수직으로 정착시키는 힘이 있고 이를 평면화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화면에 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심층을 만드는 것이다.
배동신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줄곧 수채화에만 천착한 서양화가로, 수채화를 회화의 한 장르로 격상시켰다. 그는 청결하고 단순·담백하며, 긴장된 몰입을 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임권택은 전남 장성군 장성읍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다.
그는 1950년 숭일고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3학년이 되던 해 중퇴하고 만다. 6·25의 혼란기를 목포와 부산 등을 전전하면서 보낸 임권택은 스무 살 무렵 막 영화에 투자한 신발장수를 따라 상경하여 영화계에 입문해, 1962년 26세에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하였다.
임권택은 1981년 <만라다> 이후 국내외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986년 작 <씨받이>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90년 이후에는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가 연이어 한국영화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 <서편제>는 한국영화 사상 첫 100만 관객 돌 했다. 그리고 1993년 <서편제>로 상하이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주간’이 설정되기도 했다. 특히, 한국적인 미와 정서를 담은 영화들로 영화계에 큰 획을 그은 임권택은 ‘취화선’으로 지난 2002년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과 2005년 베를린국제영화제 명예황금곰상 등을 수상했다.
임권택은 2015년 프랑스 낭트 3대륙 영화제에 초대받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임권택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이처럼 임권택은 세계적인 감독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조소혜는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자랐고 광주여상을 나왔다.
그녀는 졸업 후 은행원을 걸쳐 1984년 KBS 드라마 게임 <선택>으로 방송 작가로 데뷔한 드라마 작가이다. 조소혜는 <젊은이의 양지>, <첫사랑>을 집필해 엄청난 인기를 끌며 인기 방송작가 대열에 우뚝 섰다. 특히, 배용준 최수종, 이승연 주연의 <첫사랑>은 역대 TV 드라마 사상 최고 시청률인 65.8%를 기록했으며, 평균 시청률 47.1%로 그해 최고 시청률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밖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억새바람>, <회전목마>, <맨발의 청춘> 등 많은 TV 드라마의 각본을 쓰며, 한국의 대표적인 드라마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혀왔다. 그리고 2006년
조소혜는 2006년 새 드라마 구상을 위해 프랑스 파리 여행도 중간 몸에 이상을 느껴 진료를 받았는데 그때, 그녀의 병명은 간암 말기였다. 이후 치료를 받았지만 발견한 지 한 달이 채 안 되어 별세했다. 조소혜의 작품의 바탕을 이루는 가장 큰 특징은 “가족애”이다.
황영성은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광주광역시에 정착하였다. 그는 조선대학교 미술학과와 1968년 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으며, 국내외를 넘나들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는 광주의 대표작가이다.
황영성은 국전 문공부 장관상과 이인성 미술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지냈다. 2006년 이탈리아 나폴리 현대미술관, 독일 드레스덴 미술관, 2007년에는 프랑스 쌩떼띠엔느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황영성은 향토성과 서정성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끊임없는 화풍의 변화를 시도하며 현재까지 열정적인 작업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우리의 토속적인 풍경이나 정서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형태를 단순화시켜 표현함으로써 그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탄생시켰다.
황영성은 고향과 가족은 사람들의 가정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주변의 사물이 함께 공존하는 조화와 상생으로서의 가족, 인간과 우주의 조화 등을 존재에 대한 포용적 시선으로 작품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그는 독특한 향토성과 서정성으로 투박하고 질박한 고향과 가족이미지를 예술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제길은 일본 경도에서 태어났다. 해방과 함께 귀국, 아버지의 고향 광양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학강 초등학교를 다녔고 광주서중학교를 입학, 미술교사였던 나점석의 눈에 띄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으며, 광주사범학교를 진학하여 감수성 많았던 시절 스승 양수아를 만나 새로운 미술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우제길은 1972년 전남도전 최고상을 수상했고 1976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이달의 작가전을 비롯, 중앙화단에 진출하였다.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최고 인기작가상 수상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작가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그리고 삶의 작은 기록들과 화업의 결과들을 치밀하게 정리·보존해오고 있는 광주 미술의 산 역사이며 증인이다. 그리고 국내는 물론 독일과 프랑스, 뉴욕, 일본 등 해외전시회를 포함해 지금까지 총 83회의 개인전과 각종 국내외 700여회의 단체전을 가졌다.
우제길의 기나긴 평생의 작업들은 명암을 극명하게 대비시킨 추상적 양식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로 표현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모두들 그를 「빛의 작가」라고 부른다.
2006년 ‘한국 추상회화 50년전’(서울시립미술관), 2009년 ‘한국미술 평론가협회 100인’에 선정, 2015년 우제길 미술관을 (관장 김차순) 이로재(대표 승효상)의 설계로 새롭게 재개관하였다. 이제 작가는 자기의 총체적인 작업들을 「흔적」이라는 타이틀로 그 커다란 전시를 기획·준비중이다.
김영만은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전통 목판화 연구 논문으로 조선대학교 대학원 순수미술과를 졸업한 판화가이다. 김영만의 작품 소재는 대부분 고향인 화순의 시골 마을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농촌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광주 무등산, 목포부둣가 등이다. 김영만은 서양화에서 목판화, 수채화, 천연염색 그리고 천연염색과 목판화가 어우러진 설치미술 등 여러 장르를 두루 섭렵하고 있다. 최근에는 목판화와 황토 염색이 주를 이루는데 황토로 물을 들인 천연 염색 천에 목판화를 찍어낸 작품들은 자연의 향이 고스란히 담긴 새로운 회화 영역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업은 지극히 순수하고 간결하다. 군더더기가 없기에 메시지가 강하다. 김영만이 즐겨 사용하는 재료는 자연이다. 오래된 나뭇결뿐 아니라 흙으로 돌아가 마침표를 찍을 인간의 삶이,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 안에 모든 것과 닮았다. 그렇게 자연 친화적인 작업을 해온 탓인지 김영만 화가는 전시장이라는 폐쇄적 공간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의 전시를 즐긴다. 자연 속에서 주변과 어우러져 더욱 제 의미와 빛을 발하는 작품들이다.
김영만 작가는 그동안 DMZ를 주제로 한 통일 염원 목판화전, 광주통일미술제, 고향 가는 길 목판화전, 운주사 십 리 길 목판화 설치전, 오월전, 한국불교 미술인협회 창립전 등에 참여했다.
최인준은 최승효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아트를 공부한 설치미술가이다. 최인준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이다.
현재 최인준은 광주 민속자료 2호인 <최승효 가옥>을 관리하며, 아름다운 문화공간으로 꾸미고 있다.
광주광역시 공예명장(나전칠기)
한국예총 대한명인
중요무형문화재 제 113호 칠장(정제) 전수/이수자
빛고을공예문화마루 이사장
최씨공방 대표
공예갤러리 ‘늘’대표
최석현은 전라남도 완도 출신으로, 1972년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 어려운 가정형편을 극복하고자 나전칠기에 입문하였다. 시작은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으나, 50년에 가까운 기나긴 세월을 나전칠기 외길인생에 몸담게 된 첫 발자국이었다. 우연과 운명이 교차한 나전칠기와의 만남 이후, 그는 최고가 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으로 30대에 양림동에서 나전칠기공방을 운영하며,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최고의 나전칠기 장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최석현은 중요, 지방 나전칠기 무형문화재 장인들과 교류하며 그 기술의 완성에 매진하고 있다. 나전칠기 작업을 이어나간 반 백년간의 공예가로서의 삶으로 2015년 광주광역시 나전칠기 공예명장으로 선정되었다.
나전칠기뿐 만아니라 공예전반의 발전적 미래를 염원하던 최석현은 광주공예협동조합 초대, 1대 이사장(2007~2013년)을 역임하며, 광주공예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광주광역시 남구 공예창작촌 설립에 앞장섰다.
최석현은 잊혀져가는 전통공예에 대한 아쉬움으로 일반대중과 직접접촉을 통한 새로운 전통공예의 활로 모색을 위하여 지역에서는 최초로 양림동에서 공예갤러리 ‘늘’을 오픈하여 운영중이며, 또한 지역공예산업발전을 위해 빛고을공예문화마루를 설립,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최은정은 광주에서 태어나 양림동에서 자랐다. 그녀는 독립유공자 최한영의 장손녀이다.
최은정은 조선대학교 졸업하고 1988년 <한국수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다. 그리고 두 권의 수필집을 펴냈고 한국 문인협회·국제 펜클럽 회원이다. 그녀는 한국 수필가협회 이사이며 광주 문인협회 부회장, 광주 여성문학 시누대 회장 역임했다. 최은정은 광주문학상과 2005년 한국수필문학상을 받았다.
그녀가 쓴 <다듬이 소리>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슬하에 육 형제를 둔 시어머님께서는 그 엄청난 빨랫감을 혼자서 해내셨다. 내게 힘든 일은 안 시켰지만 푸새질만을 반드시 내가 시어머님 옆에 있어야 했다. 이불 홑니는 명주가 제격이고, 요 홑니는 흰 옥양목이 으뜸이다. 봄 풀은 누그럼해야 되고, 여름 풀은 세어야 하고, 가을 풀은 개가 핥기만 해도 빳빳해진다고 한다.
푸새질 날은 앞줄 뒷줄 흰 흩니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알맞게 마른빨래를 넓은 대청으로 걷어 와, 빨래를 넓은 대청으로 걷어와, 빨래 보를 깔고 잔손질을 한다.
솔기를 펴고, 실밥을 뜯어내고, 네귀를 맞춰 둘로 접는다. 그것을 다시 접어들고 어머니와 나는 줄어든 홑니를 양쪽에서 잡아당긴다.살짝 살짝, 뒤로 넘어지듯 잡아야지 내 손에서 빨래를 놓치면 어머니가 뒤로 넘어지시고,
너무 세게 잡아당기면 앞으로 넘어진다. 그 알맞은 당김은 균형을 맞추는 하나의 탄력 있는 멋이다.’
– 다듬이 소리 中
오소후는 광주 출생이다.
그녀는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호남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석사)했다. 오소후는 200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문득 도리포에 이르러’가 당선, 문단에 등단했다. 그리고 시집 ‘좀꽃마리’ 등을 펴냈다.
오소후는 국제펜광주위원회의 번역 분과 위원장으로 지역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지역 문인들의 작품을 번안하는 등 지역문학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기픈시’ 문학동인과 공연 시낭송 보급에도 앞장서왔다.
오소후의 남편 김남택(金南澤)은 건축업으로 가계를 경영하며 전국수지침협회 이사를 역임하고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광복지관에서 쉼 없이 5년 동안 자원봉사 및 환자무료시술 세미나 등 활동을 했으며, <무등일보 일등시민>으로 보도되기도 했다.